3월은 새해와는 또 다른 새로움이다. 누군가는 개학과 개강으로, 누군가는 일의 연속으로, 누군가는 또 다른 휴일로, 누군가는 생(生)으로, 누군가는 사(死)로 3월을 맞았다. 새로움은 별 다를 것 없이 익숙함으로 바뀐다. 누구나 그렇듯, 3월은 다 지나가건만 한 일은 하나도 없다. 언제나 그렇듯, 하는 일은 없건만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라는 것은 속박되어있음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속박되어있는 자유를 해방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보는 영화를 찾았다. 일단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보는 영화’를 구글에서 검색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보는 영화와 관련된 위키트리 기사(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68952)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우울하다로 보고, 감정을 털어버리라며 '엄청 슬픈 영화를 보고 펑펑 울기'를 추천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펑펑 울면서 체력을 소모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와 정반대로 어긋나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엄청 슬픈 영화는 제외했다.

공부도 질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보면 좋은 영화[비젬有](blog.daum.net/chic_/6856296)라는 포스트가 있기에 눌러보았다. 매우 귀엽고 촌스러운 옛날 이모티콘으로 꾸며진 포스트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1부*, 왕의 남자*, 헬로우고스트*, 나는 조지아의 미친 고양이*, 와일드 차일드, 하모니,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 본 작품)]를 추천해줬다. 추천인의 마지막 말이 심금을 울렸다. ‘다썻당..영화 별로 없지..미안 내가 문학소녀가 되고 싶지만 ㅇㅣ제 고딩이 되는 바람에..하...ㅋ’ 언제적 포스트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마음만 통하면 된다. 마음은 통했고 심금을 울리기까지 했지만, 공부하지 않아 공부가 질리지 않은데다 거의 다 본 영화여서 문학소녀가 되고 싶은 박유천여친의 추천도 거절하기로 했다.

열심히 스크롤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마음으로 꽉 차서 검색하는 것조차 무기력해져 버렸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간 포스트는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 언급하던 백영옥 소설가의 글(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04/2015090402252.html)이었다. 그녀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나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추천했다. 그중 멍하게 볼 수 있는, 멍~한 작품 ‘안경’을 보기로 했다.


영화는 유지와 하루나의 ‘왔다’는 말로 시작한다. -멍하니 영화 볼 시간이 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보고 나서야 문득 생각했다- 파도치는 소리, 요리하는 소리, 빙수 가는 소리, 자전거 굴러가는 소리로 가득한 영화는 그만큼 빈틈이 넘쳤다.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는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을 향해 남쪽 섬으로 여행을 떠나 하마다에 묵는다. 조용한 바닷가에 위치한 조용하다 못해 심심한 민박집 하마다. 그곳에서 사람은 좋지만 묘하게 말이 많은 민박집 주인 유지(미츠이시 켄), 봄이 되면 찾아온다는 묘령의 여인 사쿠라(모타이 마사코),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하루나(이치카와 미카코)를 만난다. 그들이 아침마다 하는 메르시 체조도, 사색이 전부인 그들의 삶도 타에코는 이상하기만 하다.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타에코는 다른 숙소로 떠나려 하지만, 여차여차해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 내용만으로 영화의 절반이 흘러간다. 영화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지 않는다. 걸어가면 걸어가는 속도대로, 자전거를 끌면 자전거를 끄는 속도대로 시간은 흘러간다. 나쁘게 말하면 게으르고 좋게 말하면 느린 영화다. 영화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조바심을 내는 건 타에코 뿐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무언가를 해야겠다며 조바심을 내던 타에코도 하마다로 다시 돌아오면서 그저 바닷가에 앉아 뜨개질하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사쿠라의 빙수를 그저 가만히 앉아 바닷가를 바라보며 수저를 푸기도 한다.

사색이 특기가 아니더라도 이 섬에 가면 사색이 특기가 되는 것일까. 파도마저 잔잔한 바닷가를 보며 팥을 졸이는 것부터 얼음 가는 것까지 정성이 가득했던 사쿠라의 빙수가 먹고 싶다. 언제나 온화하게 웃던 사쿠라가 팥을 졸이며 무서운 얼굴로 ‘조급해하지 말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무늘보처럼 느리고 여유롭게 정성을 음미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사람에게 이 영화는 묘한 충족감을 준다. 느리게 흘러가는 107분 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무기력한 마음이 평온함으로 잔잔하게 채워졌다. 마치 그들이 나를 대신하기라도 한 것처럼.